

[마녀의 사랑에 대하여]
(*적폐캐해석주의...)
시에나 자일스는 빅토리아 알피어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푸른 눈이 그녀를 마주 응시해 왔다. 투명한 호수와 같은 선명한 눈이, 그녀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무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빅토리아 알피어스는 언제나 그랬다. 그 눈으로 그녀를 혼자만의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는 했다.
그녀는 빅토리아 알피어스를 싫어한다. 증오한다.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한다. 실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미 충분히 이상했던 그녀의 삶을 더욱 꼬이게 한 장본인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혹은 짐작하고 있었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
맨 처음 빅토리아를 마주했던 날을 기억한다. 아마 빅토리아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사람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수리 경과 휴고 경의 조카를 궁금해했고, 어쩌다 보니 시에나 역시도 따라오게 되었다. 사실 궁금하고, 만나 보고 싶어서 어느 정도는 어머니를 졸랐다. 위험하지 않을까 어머니는 걱정하셨지만, 수리 경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설득하기도 했다. 방에 들어선 순간 밀려오는 냉기에 몸이 떨렸다. 혹은 시선이 마주쳐서인지도 모른다. '괴물'이라고 불릴 그 경이로운 능력을 갖추고서도 빅토리아의 눈은 맑고 곧았다. 저와는 달랐다. 거울로 제 눈을 본 지는 꽤 오래됐지만, 꼭 보지 않아도 저런 눈빛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빅토리아는 그녀의 눈이 제법 마음에 든 듯했다. 무심하던 눈이 한 번 깜빡였고 눈동자에 약간의 호감이 들어찼다. 순간 말 못할 감정이 밀려들었다.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대로 그 방을 벗어났다.
다음 번에 만났을 때는 둘 다 조금 더 차분한 상태였다. 평범하고 약간은 가식적일 인사를 했다.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들이 흔히 처음 만났을 때 할 법한 대화를 했다. 둘은 제법 말이 잘 통하는 듯했다. 사실은 또래 친구를 본 게 둘에게 모두 처음이었다. 마법 얘기부터 어딘가 이상한 부모와 보호자 얘기까지, 빅토리아는 상대적으로 모르는 게 많았고 시에나는 그런 빅토리아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이 썩 재미있었다. 아기 새처럼 빅토리아는 시에나를 졸졸 따라다녔고 시에나는 그런 빅토리아에게 흥미가 솟았다. 저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서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니. 순수한 호의는 아니었지만 둘은 그렇게 제법 잘 지냈고 어머니와 수리 경은 기뻐하며 두 분이 만날 때 시에나와 빅토리아가 따로 놀고 있어도 좋겠다고 했다. 곧 두 분이 없이도 약속을 잡아서 만나곤 했다. 시에나도 빅토리아도 나이가 어리지만 약한 마녀는 아니었고,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으니까. 마녀 사회에서는 드물게 잦은 교류였다. 특히 친교는 더욱 그랬다. 그때의 흥미와 별개로 어쩌면 그때부터 정을 붙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시에나는 씁쓸하게 회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나지 않았을 텐데.
첫인상처럼 빅토리아는 맑고 곧은 사람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랐으나 큰 악의는 품지 않았고 늘 솔직했다. 시에나에 대한 호감도 곧이곧대로 표현했다. 신뢰가 담긴, 맑은 호수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면 속에서 뭔가 솟아올랐다.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 눈동자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쩜 저렇게 곧은 눈동자로, 나를. 그래서 조금 친해진 후로는 괜히 거짓말을 하고, 장난을 치고, 신뢰를 흔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흥미가 없던 건 아니었다. 과연 어디까지 제 말을 믿을 것인가.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제 뒤틀린 성격을 실감하게 되어 가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를 아득바득 가는 빅토리아를 지켜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해지다가 웃음이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은 같이 성장했다. 시에나의 능력은 갈수록 강대해졌으며 능숙하게 감정을 숨기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빅토리아 역시 강해졌으나 마녀 사회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취급받는 방식이었다. 술식이나 이론에는 여전히 무지했다. 여러 사람이 가르치려 시도해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일단 빅토리아에게 의지가 없었다. 재능은 잘 모르겠지만. 시에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빅토리아의 눈은 여전히 맑아서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점이 그녀를 가끔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어쨌든 둘은 여전히 자주 만났으며, 마녀 사회에서는 손에 꼽힐 친분을 형성했고, 빅토리아는 여전히 시에나에게 속아 넘어갔다.
대부분은 즐거웠다. 이미 웬만한 건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졌으면서 아직도 속아 준다니. 그게 빅토리아의 정을 주는 방식인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하든 고분고분하게 속아 주며 시에나가 원했던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것이. 옛날에 보이던 경악하거나 놀란 표정은 빅토리아에게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또 시에나의 거짓말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빅토리아는 언제나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무덤덤하게 눈앞의 문제를 헤쳐나가곤 했다. 원망은 없었다. 단지 왜 그랬냐는 말 한마디뿐. 참 기묘한 관계였다. 거짓말을 하고 속아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뒤틀린 시에나와 이제는 속지 않을 것 같지만 어쩌면 자의를 섞어서 속아 주는 덤덤한 빅토리아. 그것조차도 즐거웠다.
그러는 새에 제 안 어딘가에서 자라난 감정이다. 현재와 미래의 구분조차 모호한 마당에 타인에 대한 구분은 더더욱 없었다. 기껏해야 정을 주었던 오라비마저 집을 나가 버리고, 지극히 흥미와 필요에 따라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을 판단하는 제 안에 그런 틈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긍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바탕에서 나온다. 검은 바탕에서는 어느 색도 나올 수 없다. 검은색을 제외하고는.
시에나는 제 부모와 같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있고 사람은 때로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완벽하며 동화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물며 마녀라면 더 그렇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유일하다고 해도 될 터였다. 지금껏 살아오며 본 많은 마녀들의 사랑이 그러했으며, 꿈에서 본 수많은 미래에서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정말 '참된 사랑'을 하는 부모를 둔 입장에서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사랑이라는 건 지극히 까다로운 일이고, 지금 수도에 가서 거리를 돌아다닌다면 발에 채도록 많을, 연인들이 속삭이는 사랑은 높은 확률로 거짓이 아닐까.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는 사랑시들, 어디에나 떠도는 감정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가볍지 않은가. 누군가 다치고 상처입는다면 그건 사랑이라기엔 너무 파괴적이지 않은가.
그러니 제 감정도 사랑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꺾고 싶고, 가둬두고 싶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절대로 꺾이지도 가둬지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저 미워하고, 뒤틀려버린 저 자신을 수백, 수천 번씩 탓하고,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감정 역시도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저 저열하고 뒤틀려버린 집착이다.
그녀는 제 부모를 정말 좋아했지만, 이럴 때는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제가,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일반적인 마녀 밑에서 태어났다면 조금 나았을 것이다. 혹은 평범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제 감정이 더 곧은 방향으로 자라나지는 않았겠지만, 능력이 없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빅토리아를 가둬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상상할 능력조차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신을 지긋지긋하고 추악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의미 없는 원망이다. 제가 뒤틀리게 자란 건 부모의 탓이 아니다.
빅토리아는 한 번도 그녀의 꿈에 나온 적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해진 미래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마음에 안 드는 미래가 있다면 어떻게든 부수고 말 것이다. 혹시라도 빅토리아가 다치거나, -제법 흔한 광경으로-죽는 미래를 본다면 그녀 역시 제정신으로 남은 시간을 살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꿈에라도 나와 주기를 애타게 빌었겠으나 그녀는, 여명의 마녀 시에나 자일스는 그럴 수 없었다.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빅토리아가 그 순간을 살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녀의 탄생성 페베는 그렇게 잔인했으나 너그럽기도 했다.
스스로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음에도 겉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빅토리아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 자체가 충격은 아니었다. 빅토리아는 덤덤하지만 드물게 난처한 표정으로 실수였다고 말했고 시에나는 그 말을 믿었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면 그 말 역시 믿었을 것이다. 별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빌미가 되어서 빅토리아가 타격을 입었고, 투텔로 떠나며, 그렇게 되는 것에 자신의 아버지가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화가 났다. 물론 저보다 백 배 정도는 사나운 수리 경의 기세에 눌려 말도 못 꺼냈지만. 괜히 답답하고 불안했다. 시에나 자일스가 '답답하고 불안'하다니, 빅토리아가 들으면 비웃었을 것이다. 알아차릴까 봐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빅토리아가 고작 그런 곳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원한다면 만날 방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순수한 것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빅토리아가 만난 마녀 중에는 제일 뒤틀려 있을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 곧은 눈으로 곧은 이상 같은 것을 추구해 나간다면 더없이 사랑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무의미하고 어쩌면 불합리하고 부당할 피를 묻히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얼음 같고 호수 같은 마녀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정치싸움에 휘말리는 꼴은 보기 싫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저를 떠나는 것 같아서, 이런 관계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또 남겨질까 봐. 분노도 더욱 커졌다. 감히 저도 가둘 수 없는 사람을 가두려는 꼴이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에나는 이성적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과, 빅토리아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선에서는. 어떤 피해가 올지 뻔히 알아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수많은 논리들에 파묻혀 시에나는 가라앉았다. 호수 안으로, 끊임없이.
시에나 자일스는 빅토리아 알피어스를-
투텔로 떠나는 날에도 빅토리아의 눈은 투명하고 무심했다. 군복은 제법 잘 어울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휴고 경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더러 인사하고 오라고 보냈기 때문에 그곳엔 수리 경과 자신뿐이었다. 수리 경과 빅토리아의 인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건조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의 성격과 상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수리 경이 나직이 무언가 속삭였고 빅토리아는 멍하니 수리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리 경은 바로 몸을 돌려 시에나에게 눈짓하곤 멀어졌다. 심장이 떨어졌다. 몇 분만 있으면 빅토리아는 떠날 터였다. 투명한 호수와 같은 눈이 저를 마주하자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속에서 싸늘한 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먼저 입을 연 건 빅토리아였다. 여느 때처럼 여상한 목소리였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알아, ...조용히 해."
빅토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게,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시에나는 자신에게 조소했다. 이미 끝난 일이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빅토리아는 수리 경을 봐서라도 갈 것이다. 말릴 수는 없고 강제로 꺾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지만 곱게 보내 줄 수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빅토리아가 나름 신경을 쓴 듯이 물었다.
"헤어지기 싫어?"
저게 진짜. 시에나는 눈을 감고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쪽을 대답하든 더욱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빅토리아가 미웠다. 세상이 미웠다. 한 번도 제게 엄청나게 친절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 정말 온 세상이 저주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뭐라도 대답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서늘한 체온이 와 닿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얼마 동안은 정말 멈췄는지도 모르겠다. 빅토리아의 체온은 서늘했다. 시에나 역시 따뜻한 편은 아니었기에 포옹은 미지근했다. 포옹이 어색한 빅토리아가 곧 팔을 풀려고 했으나 이대로 놓기 싫었던 시에나가 꼭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잠시 무력을 써서 벗어날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빅토리아는 곧 조용히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시에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 이유인지 목소리는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오늘만... 이런 거야. 다음에 만날 때는 아니야."
"응, 그러든지. 다음에 찾아가면 다시 나를 골리거나 내쫓거나 마음대로 해."
너무나도 빅토리아다운, 무심한 대답이라 눈물 대신 웃음이 나왔다. 아마 빅토리아는 제 뒤엉킨 감정 같은 건 영원히 모르겠지만. 그냥 이 정도의 다정함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냥 가끔, 제 옆에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빅토리아는 어디서든 고고하고 무심하며 사랑스러울 테니까. 끌어내릴 수 없는 사람일 테니까.
"정말 그럴 거니까 걱정하지 마. 골치 아픈 일 끌고 오면 내쫓을 거야."
빅토리아가 작게 웃었다. 갈 시간이었다.
"무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별 일이야 있겠어."
별 일은 많을 것이다. 다치는 일은 없을 테지만, 군부대의 여러 일에 얽히면서 상처받거나 힘들어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끔찍하게 싫었다. 가능했다면 영원히 옆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웃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는 법이다. 여명의 마녀로 살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벼운 악수와 함께 빅토리아는 떠났다. 시에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미련과 미움과 온갖 뒤엉킨 감정들이 시선에서 진득하니 녹아났다. 빅토리아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눈으로, 시에나의 단 하나 이상과 긍지가 스스로 발을 내디뎌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