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꾸었습니다. 커다란 개가 당신을 물었던 그날, 반짝이는 햇살 아래의 후원, 그 다채로운 색들이 어우러진 곳에서 당신이 제게 꽃을 내밀었던. 커다란 짐승은 무자비하게 당신을 깔아뭉갰습니다. 이내 콰직, 끔찍한 소리가 들리다가 멎습니다.
“아아…!”
톡 톡 톡. 피가, 진득하고 아린 피가 당신의 손을 가늘게 타고 떨어졌습니다. 구멍이 뚫려 만신창이인 모습으로 당신은 제게 뭐라 말했죠?
“…넌 괜찮아? 아프지는 않고?”
어리석은 황녀님, 저는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샌가 주위는 온통 붉었고, 그 암담한 세상 속에 저희 둘뿐인 아득한 상상을 했습니다. 숨을 가쁘게 넘기는 당신을 차마 보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저와 당신의 위치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녀님.”
아스라질 듯 희미하게 당신을 부릅니다. 시야가 뒤집히고, 주위의 풍경의 처량한 후원의 한 부분으로 바뀌고, 저는 당신의 품에 안겨 누워 있군요. 당신의 얼굴이 아득하니, 필시 제 삼자의 시선일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황녀님? 울지 마세요.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훔치려 했으나 닿지 못할 팔은 그대로였습니다. 절절한 당신의 울음만을 남긴 채.
… …
평화로운 오후였다. 생존이라거나, 4행정청 일이라거나, 카스토르 탓에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아실리도 어쩌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반짝이는 날. 후원의 향기는 달고 푸릇했고 싱그럽다. 나름대로 힘껏 해의 영양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레베카? 이리 와, 같이 마시자.”
자색 눈을 다정히 늘어뜨리고, 티 테이블 아래 닿지 않는 발을 발랄하게 허우적거리며. 말갛게 갠 웃음은 백치의 것이었으나 분명히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황녀의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레베카는 아실리의 맞은편에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득 바람이 분다. 그리 거센 것은 아니었으나 머리카락 정도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띄울 수 있을 만큼의 세기로. 아마 신관들의 손이 닿지 않는 한 제일 공평한 것은 자연이 아닐까. 레베카는 실없는 생각을 말로 내뱉는 대신 다른 걸 눈에 담기로 했다. 뱉는 대신 담는다면 언젠가 터져버릴 것이 자명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날이 오늘만 아니면 되니까.
“그러고 보니까 레베카.”
“예?”
“어때, 생각해 봤어? 미래의 부군상.”
“아직도 그 타령이십니까.”
약간의 질책을 담은 검은 눈. 그 일부는 사랑스러움을 띤 채.
“없으면 내게 와. 전에 말했다시피 난 레베카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거든.”
레베카는 묻고 싶었다.
“어찌…….”
그리 달콤한 말을 흘리십니까?
“주인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농이라면 그만 멈춰주세요.
“그거 칭찬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두죠.”
붉은 공녀가 고아한 웃음을 머금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신의 시녀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으응?”
“혹여나 당신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심장이 떨립니다.”
레베카는 변했으면 했다. 그의 중간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곳까지. 연인들만이 부를 수 있는, 그의 ‘로제’를 입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
붉게 타오르는 공녀는 밝은 금발과, 곧잘 피어나는 웃음과, 밝은 눈동자를 말했다. 그것은 휘둘리듯 내뱉은 말이었고, 나중에 제 앞의 황녀를 칭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품은 마음은 제 선택이니.
‘저는 황녀님 당신을…….’
뱉지 못한 말은 찻잔에 녹아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