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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황후 나비에X라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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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슈가 라스타를 구해와서 나비에에게 맡겼다는 날조가 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동대제국의 본궁. 그 중에서도 사람이 자주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에 구두 굽의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동대제국의 귀한 황후인 나비에와 시녀들의 발소리였다. 나비에는 빠르지 않은 느긋한 걸음으로 복도 끝에 있는 여분의 방으로 향했다. 사냥에서 돌아온 소비에슈가 그녀를 따로 불러 특별히 부탁했던 일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소비에슈는 ‘덫에 걸린 안쓰러운 여인을 데리고 왔으니 황후가 돌보다가 돌려보내 달라.’고 말했다. 점심식사 전에 그가 돌아왔으니 지금 그 여인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것은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다. 시녀들이 나비에의 방문을 알리고 문이 열렸다. 그녀의 상태를 진찰하던 것으로 보이는 궁의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나비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도착 직후부터 궁의에게 상처를 보이느라 아직 씻기지도 못한 듯 머리카락의 이곳 저곳이 엉켜 있었고, 피딱지가 군데군데 엉겨 붙어 있었다.
나비에는 그녀를 가만히 살폈다. 간혈적으로 앓는 소리와 함께 다리를 떠는 것을 보아 그 통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녀를 추궁하려는 시녀들에게 고개를 젓고 궁의에게 상태를 물었다.
“상처가 깊던 가요?”
“예. 치유 마법사가 다녀가면 겉의 상처는 낫겠으나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보조인을 곁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 한가지 문제는 여즉 고개를 들지 않는 여인에게 있었다. 미리 전해들은 말로는 치료할 때도 크게 겁먹고 한참을 소리질렀다고 한다. 혹시라도 타인의 손길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에 따른 설명이 필요할 터이니 대화를 해야 했다. 가여운 토끼같이 떠는 이에게 억지로 고개를 들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황제의 부탁으로 그녀를 맡게 된 이상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겁을 먹었으니 달래야 하겠지.’
나비에는 궁의와 시녀들을 잠시 물렸다. 직접 대화하려는 나비에를 로라가 걱정스럽게 보았지만 안심 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나비에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침대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끄트머리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곧 간혈적인 떨림을 제외한 어깨의 떨림이 멈추었다. 나비에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람과 닿는 것이 싫은가?”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살살 저어 그렇지 않음을 표했다. 그에 나비에는 안심했다. 덫에 걸렸다는 것은 아마도 무언가에 쫓기는 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귀족이라면 이미 데리러 왔을 것이고 평민일 수도 있겠으나 몸 이곳 저곳이 심하게 상해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나비에는 그녀가 그보다 신분이 낮은 이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소리를 잃은 것은 아닐까 잠시 걱정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비에는 속으로 안도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온 분은 동대제국의 황제 폐하시다. 폐하께서 내게 너를 보살피라 이르셨으니 너의 안위는 내가 책임질 것이다. 네게 하녀를 하나 붙여줄 테니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아이를 통해 내게 전하거라.”
“…”
여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에는 전할 말은 전부 전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줄곧 웅크려 있던 여인이 다급히 나비에의 치마자락을 잡았다. 귀족 중에서 가장 귀한 신분인 황후에게 감히 무례를 저지르고서도 여인은 되려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비에는 여인의 때묻은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진흙 속의 진주라는 말이 있지.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인이 꼭 그 진주같이 빛났다. 나비에는 그녀의 손을 쳐내는 대신 가만이 눈을 마주했다. 그 시선에 큰 눈망울이 마침내 가장 맑은 보석을 떨궜다.
“라스타를 혼자 두지 말아요....”
여인, 라스타의 맑은 목소리가 나비에의 심장을 간질였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작은 여인이구나. 나비에의 고운 손이 거칠고 모난 라스타의 손을 겹쳐 잡았다. 라스타가 놀란 눈으로 따스한 온기를 준 이를 보았다. 자신의 지옥 같은 생활속에서 몇 번이고 이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있던 영지의 주인, 그의 하나뿐인 딸 르베티가 가장 존경하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
“황후 폐하….”
“나를 아느냐?”
“네… 나비에 황후 폐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멍했다. 나비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국의 황제가 데리고 왔다는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여인이 자신을 이렇게 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긴, 말로만 듣는 것과 직접 마주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 나비에는 방금 전 여인이 스스로를 칭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스타.”
“네….”
“돌아갈 곳이 있느냐.”
“…! 아….”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갈 곳이 없다면 머물 곳을 마련해 주려 한다.”
나비에의 말에 라스타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곧 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라스타는… 이 곳에 머무를 수 없는 건가요?”
“…황궁에?”
라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비에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라스타가 도망노예가 맞다면 중죄인이다. 주인을 찾아 재판을 열고 그녀를 위해 면책권을 써야 할 지도 모른다. 이것 저것 처리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다. 하지만.
“머물거라.”
“…! 정말인가요?”
“그래.”
소비에슈가 제게 직접 맡긴 사람이니 이정도는 해줄 수 있을 터다. 라스타가 상기된 얼굴로 나비에를 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맑은 두 눈에 생기가 가득하니 참으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후 라스타는 더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다리가 심히 떨리고 있었기에 나비에는 그것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대기중이던 로라와 베르디 자작부인은 나비에의 구겨진 옷과 핏자국을 보고 기함을 토했으나 나비에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방울이 딸랑이는 것 같이 청조한 목소리였지. 그리고 그 웃음.
‘맑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 생각을 끝으로 나비에는 걸음을 옮겼다. 라스타가 자신의 바쁜 일상속의 작은 즐거움이 되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에가 나간 뒤로 라스타는 침대 구석에서 베개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믿기 어려울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후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황후는 얼음과 철을 반씩 섞어 놓은 사람이라는 말이 정확하다고 느낄 만큼 딱딱한 사람이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손으로 라스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었다. 라스타를 황궁에 머물게 해주고 라스타의 안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어떡하지?’
라스타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은 왕자가 아닌 여왕이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데리고 온 것이 황제였다는 사실은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